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안 사건 (문단 편집) == 이후 == 장제스의 석방에 대해서 공산당은 장제스가 요구사항을 수락했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장제스가 수락했다는 사안에 대한 통일된 보도도 없는 중구난방적인 선전밖에 없었다. 장제스의 석방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이를 환영하는 군중 집회가 열렸다. 12월 26일 오후, 장제스는 뤄양에서 난징으로 돌아왔고 국민정부 주석 [[린썬]]을 비롯한 수많은 정부 인사들이 장제스를 영접했다. 장제스는 12월 29일 시안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행정원장,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사직했으나 국민정부와 국민당 중앙상무 위원회는 모두 이것을 반려했다. 장제스는 1개월 간의 휴가를 떠났고 1937년 정월을 고향에서 보냈다. 장쉐량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2월 31일 징역 10년과 공권박탈 5년을 선고받았다. 1937년 1월 4일 장제스는 그를 특별사면해주었지만 대신 장쉐량을 가택연금에 처했다. 장제스는 시안에서의 완강한 모습에 다시 지도자의 위치를 굳건히 했지만 전국 동시에서 끓어오르는 여론을 어찌하진 못해 초공작전을 취소하고 국공합작에 합의해야 했다. 장쉐량은 1937년 시커우에서 연금되었고 중국 곳곳의 안가를 전전하다가 1946년에 [[타이완섬]]으로 끌려갔고 장제스가 죽고 아들 [[장징궈]]가 총통 자리를 물려받은 이후에도 계속 갇혀있다가 장징궈까지 죽고 1993년 [[리덩후이]] 총통 재임기가 되고 나서야 겨우 연금 상태에서 풀려났다. 이후 그는 [[미국]] [[하와이]]로 이주했고 2001년 그곳에서 죽었다. 대일 항쟁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상관을 억류할 정도로 고향인 동북을 그토록 사랑했으나 다시는 고향을 밟지 못했다. 연금 기간에 정치와는 인연을 끊고 역사 공부에 매진하여 [[명나라]] 역사의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쑹메이링은 장쉐량 석방을 장제스에게 권유했으나 믿었던 장쉐량에게 뒤통수 맞았던 배신감이 컸던 장제스는 끝내 이를 따르지 않았고 어느날 장쉐량이 위장병에 걸렸단 소식에 "그놈 곧 죽겠군" 하고 좋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의사를 보내 장쉐량을 치료해준 것이 쑹메이링이었다.[* 장제스와 결혼하기 이전부터 쑹메이링은 장쉐량과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장쉐량은 죽기 직전의 회고에서 쑹메이링에게 이때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시안에서 장쉐량이 낮은 자세로 장제스를 대한 것 역시 쑹메이링과의 이러한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장제스와 장징궈가 다 죽자 쑹메이링은 오랜만에 대만을 찾아 장쉐량의 연금 석방을 거들었다. 2001년에 장쉐량이 죽었을 때 쑹메이링은 뉴욕타임즈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읽고 조의를 표했으나 당시 '''104세였던''' 그녀가 장례식에 가기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대리를 보냈다. 다른 주역인 양후청은 사건 이후 유럽 여행을 떠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귀국하지만, 귀국 후 즉각 투옥되어 10여년 간 감옥생활을 하다가,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피하기 직전인 1949년 충칭에서 장제스의 명령으로 부하, 맏딸과 함께 처형된다. 처는 양후청의 투옥 직후 항의하여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병사했다. 그 외에 살아남은 자녀는 공산당에 우대되어 중공 정권 하에서 관리생활을 했다. 장제스의 최측근 중 하나였던 [[허잉친]](하응흠)은 이때 장제스가 죽거나 말거나 시안을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장제스가 살아 돌아오자 신임을 잃어버렸고[* 그래도 대만 시절까지 이 양반은 고위직으로 누릴건 다 누렸다. 중국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은 것도 바로 이 사람. 기반을 다 날리고 몸만 털레털레 와서 실권 없는 명예직만 전전한 옌시산, 바이충시를 비롯한 다른 군벌들에 비해선 영화로운 말년을 보냈다.] 이후 장제스의 신임을 되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장제스의 신임은 [[천리푸]], [[천궈푸]] 형제, [[천청]], [[다이리]] 등에게 옮겨간 후였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다음해에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중일전쟁에서 장제스는 그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전의를 돋우며 항전을 주장했다. 사실 장제스는 일본인들을 제국주의자라고 혐오했지만 일본인들을 무력으로 몰아낼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고 이 때문에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자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행되던 것이 1930년대 중반의 장제스의 경제개발과 군 현대화 계획이다. 이로 인해 장제스는 상당히 강력한 중앙군을 양성하고 항전의 밑거름을 다질 수 있었다. 장제스는 1939년 정도엔 일본과 일전을 겨뤄야 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일본의 야욕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으니 시안 사건이 터진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37년에 전쟁이 터지고 만 것이다.[* 한 예로 60개 개편사를 편성하려고 했으나 현실은 갓 편성된 10개 사를 포함한 30개 사로, 그 중 8개 사만이 그럭저럭 신식무기를 보유할 뿐이었다. 참고로 개편사 3~5개가 일본군 정규사단 1개와 동일시 취급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